2018-08-31

젠더트러블

bookmemo_genderTrouble

2015-08-15
2015-09-05

용어들

전 담론적


앞으로 더 조사해 볼것들


메모

page.

쾌락은 금지됨을 통해서 생산된다.

… “젠더 정체성은 무엇보다도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으로 입증된 금기를 내면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 (결론: 엄마를 사랑할수가 없어서, 여성화가 되는 것이고, 아빠를 사랑할수가 없어서, 남성화가 되는 것인가..그렇다면 여자가 아빠를 사랑할수 없어서, 남성화가 되는것도 가능하지 않은가? 대신 엄마를 사랑할수 있다는 금기가 생성되는 대신에? 흐아아하함… 실은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솔직히,,, 이책은 하루나 이틀만에 마스터 할수있는 그런책이.. 절대 아니야.절대 좀더 이책을 읽기 위해서 필요한 책들이 꽤나 많아. 그만큼… 정말 .. 나는 이책을 정말… 이해 하고 싶어. )

(아, 이분의 한말 한말이.. 굉장해!!)
” 우울증의 결과로 오는 동일시는 해결되지 않은 대상관계를 보존하는 양식이며, 동성간의 젠더 동일시의 경우 이 해결되지 않은 대상관계는 틀림없이 동성애적인 것이다. ”
” 사실 젠더 유사성이 엄격하고 안정될수록 원래의 상실은 더욱 해결을 보지 못한다. ”
” 따라서 ‘기질’ 이라는 언어는 거짓 근본주의로서, 금지의 결과를 통해 정서적으로 형성되거나 ‘고정’된다. ”
( 여기서 기질이라는 것이.. 기질이라는 것이… 어쩌면 어떤 선호, 혹은 취향, 관심분야… 이런것들을 의미할수 있지 않을까? 어렸을적에 책의 낙서가 금지될때, 책에 낙서를 하는 행위가 자주 반복되었고, 그리고 그것의 나의 특성으로서 자리 잡은 것일수도 있을것이다. 결국. 본질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내가 자주 하는 행동이 결국, 나라고 말할수 있는 무언가가 되는것일수도 있을거야… 아마. 또다른 나의 예로써, 학교 수업이 끝날때, 게임을 하는 것도 그런 예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은 게임을 하는 것이 금지가 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어쩌면 게임을 많이 안하는 것일수도 있다. 그리고 그림도 마찬가지 이고… 그럴수도 있겠다는. 논외로 따지 자면 일본의 애니메이션의 확장효과는 손쉽게 그 정보를 얻을수 있기에, 다른 어떤 것보다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고 그결과 그것은 굉장히 널리 퍼지고 오히려 다른 애니메이션보다 그 작품 자체의 질이 증가한 결과라고.. 한다면, 그 것은 그전에 읽었던 제2의 기계시대의 책에서 어떤 인용구에 맞는 설명이 될것이다. .. 정보의 풍요로움이 그 정보를 성장시킨다. 아직까지는 그것이 맞는 사실인것 같다. 그러니까.. 접근의 허용도, 다양하게 접근할수있는. 저비용의 어떤 그런 것이 필요한것이다. )
” 그 결과 기질은 심리의 근원적인 ..그런 것이 아니라, 에고이상의 공모와 가치전환의 행위및 문화가 부과한, 법으로 부터 생산된 효과.

” 우울증에서는 이별, 죽음, 혹은 감정적 유대의 단절 들 .. 다양한 수단을 통해서 사랑받던 대상이 상실된다. “

웹상으로 누군가 (완전 모르는 누군가)의 일기를 보는것은 스토커짓이 아닐까? 모르겠다. 티비를 보는것도 스토커짓 아닌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왜 우리는 티비를 보면서 웃고 있는것일가? 그사람은 너를 알지 못하는데????
만약 실제로 티비속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사람은 너를 당연히 어색하고 남으로 느끼는데, 당신은 친절하게군다면, 얼마나 실망스럽고 울적할지 모를까? 아니 그것보다 .. 정말. 이것은… 스토커 짓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당신은 깨닫게 된다. 내가 얼마나 바보같이 굴었는지… 그후, 티비를 보지 않겠지만…
에고 이상은 무엇인가? : 에고 이상. (너는 누구냐??! 뚜히항!)
: 나르시시즘적 소망을 실행하는 하나의 이상
(논외: 블로그의 메뉴에 “나르시즘”파트 부분과 “쾌락의 원천”부분을 만들어 내야 겠다. 좋았어.. )
” 분명한 젠더 정체성과 이성애를 생산하고 규정하는, 내면화된 법의 결과물. 기질이라는 것은. “

” 정신분석학적 서사에서 기질은, 구제되지 않은 동성애적 카섹시스 때문에 야기된 분란을 잠재우기 위해 뒤늦게 문화라는 이름으로 오는 금지에 의해 훈련받고, 굳어지고, 통합된다. .. 법은 세번째 작용을 수행한다. 즉 자신이야말로 심리적 진실를 출발점으로 삼는 인과관계의 서사 안에 있는 논리적 연속성의 원칙이라고 선언. 이러한 법의 배치는 섹슈얼리티와 권력관계의 문화적 기원으로 들어가는.. 더욱 급진적인 계보학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

푸코의 [성의 역사]
“… 푸코에 따르면 이 법은 결과적으로 욕망을 침묵시키거나 변형시켜서, 이차적이거나 부차적인 불만의 형식이나 표현으로 바꾼다. 푸코는 근원적이면서 억압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온 욕망이란 사실상 복종하게끔 만드는 법 자체의 효과. ( 욕망 –> 쾌락, 즐거움. 그것은 법. 복종의 효과. 라는 말이구나..) .. 이때 담론적 실천이란 그것이 목적론적 도구로서 자신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억압된 욕망이라는 언어적 허구를 생산한다는 의미. 법이 스스로 맥락화하는 틀을 구성하는 만큼, 문제의 욕망은 ‘억압된 것’이라는 의미를 띠게 된다. 사실 법은 그 자체로 ‘억압된 욕망’을 규정하고, 활성화하며, 그 용어를 순환시킨다.”
(미친…!! 시발. 졸라 좋은. 아. )
”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 그리고 은연중 동성애에 대한 금기는 ‘기질’이라는 개념에 자리잡고 있는 고유의 욕망을 전제로 하는 하나의 억압적 명령이다. 이 기질은 원래 동성애적 리비도 경향에 대한 억압을 겪고 난뒤 위치를 바꿔 이성애적인 욕망 현상을 낳는다. 이 특별한 유아 발달기의 메타서사(metanarrative);–> 왜 narrative 인가? 왜 이야기일까? - 구조는 성적 기질을 전담론적이고, 시간적으로는 일차적인 것으로, 존재론적으로는 어떤 목적을 가진 분멸한 충동에 비유한다. 그 충동은 언어와 문화로 등장하기에 앞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런 문화적 영역으로의 진입자체가 욕망을 원해의 의미로 부터 비껴나가게 만드는 것이다. 그 결과 문화 속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일련의 위치 변경이 된다. 따라서 억압적인 법은 실상 이성애를 생산하며, 단지 부정적이거나 배타적인 코드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허가로서, 가장 적절하게는 담론의 법으로서 작동한다. 이 담론의 법은 말할수 없는것의 영역을 정하고 구성하면서 말할수 없는 것과 있는 것을 구분하고, 불법적인 것과 합법적인 것을 구분한다. ”
.. “라캉.리비에르. 프로이트 어떻게 동일시가 작동하고 정말로 작동한다고 말을 할수 있을까? “

줄리아 크리스테바. 3부

아버지 법의 ‘보편성’은 인류학의 영역에서는 저항.. 어떠한 역사적 맥락에서도 그 법이 주장하는 “의미”가, 라캉의 설명만큼 그리 일의적이거나 결정적 효과가 있지 않다는 사실을 고려하는것이.. ..

여기서도 “서사. 나레티브 라는 말이 나온다. “; ” 자전적 서사를 구성하는 동일시는 언제나 부분적으로는 조작된 이야기이다. ” (미췬..!!!!! 끄야아아아! )

” 라캉은 우리가 결코 자신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할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언어가 말하는 주체로 하여금 그 말의 억압된 리비도의 근원에 닿지 못하게 가로막기 때문이다. ”
.. 주체가 탄생하는 순간, 즉 법이 제정되는 순간은 무의식 자체만큼이나, 말하는 주체에 똑같이 앞서 있가 하더라고 우리는 그런 메타역사를 말할수 있고 또 말해야 한다.
사실 (남성적/여성적 위치로 고정된 기원적이거나 근본적인 동일시로 끝내 환원될 수 없는 ) 다양한 동일시의 가능성이 시사하는 바는, 법이란 결정적인 것이 아닌 데다 ‘그’ 법조차 하나가 아닐수 있다는 점이다.

(공. 깜. ..? 하고 싶지만. 부족하네요. 쯔아압.)
동일시의 의미나 전복 가능성에 대한 논쟁은 이런 동일시가 정확히 어디에서 발견될 수 있는지 여전히 불분명한 채 남아 있다.
(?) “합체”란 환영이지 어떤 과정이 아니다. Roy Schafer, A New Language for Psycho-Analysis.
아. 진짜. 이책은 읽어도 읽어도 같은 부분을 읽어도 읽어도 .. 정말이지. 엄청난.. 보물이 나온다. 무슨 황무지를. 금을 찾아 떠나는 것 같아!

( 잠깐, 갑자기 생각이 드는데, 그럼 무성애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 +—- + )

내면화와 동일시 : 정신분석학의 역사 W.W. Meissner, Internalization in pshchoanalysis

부인된 슬픔의 상태. 우울.

우울증을 통해 유지되는 동일시가 ‘합체’ 된 것이라면 이런 질문을 던질수 있다. 합체되는 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문자 그대로 몸 안이 아니라면 아마도 그것은 몸 에 있을것이다. 몸 자체가 반드시 하나의 합체공간으로서(이거슨.. 수단을 의미하는건데..) 이해되어야 하는, 그 표면적의미의 몸 위에 말이다.

에이브러햄과 토록 Nicolas Abraham and Maria Torok.
애도: 내투사. introjection. 그 자체로 상실/ 빈 공간을 설정/ 그 대상을 의미라는 동시에 대체되는 말의 형성을 통해 이뤄진다. 은유적인 일. 형상화하고 부재를 뛰어넘는다.(그랫!! 은유로 만드는 활동을!!)
우울: 상실의 마법같은 해결, 합체. 대상이 마법처럼 어떻게든 몸안에 유지되는 지연되거나 부인된 슬픔의 상태를 말한다. 반 은유적. 근본적 명명 불가능성. 상실을 보유한다. 다시 말해 합체는 상실을 명명하거나 인정하는데 실패할 뿐 아니라 은유적 의미화의 조건 자체를 침식한다.
(흠…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것 같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될지 알것같다. 그리고 왜 영상을 만드는것이 치료가 되는지 알것 같다. 왜 집착에서 벗어날수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의 말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이해가..? 아니. 흠..? )

… 욕망의 지시자, 즉 욕망의 대상이 어떤 영원한 대체물이라는 의미이다.
.. 젠더 정체성은 자신을 몸에 암호화하고 사실상 살아있는 몸과 죽은 몸을 결정하는, 상실의 거부를 통해 설정된 것이다.
반은유적 활동으로서의 합체는 몸 “위에” 혹은 몸 “안에” 상실을 “문지 그대로 새겨넣어서” 몸의 사실성으로, 즉 몸이 문자적 진리로서 ‘성’을 갖게 되는 수단으로 나타난다. (우와~~~~!!><)
( 굉장해.. 라고 감탄밖에 못하겠다만… 와우. 이렇게 되면 이분법적인 것들은 정말 사라지게 되.. 섞이는거지! 예측을 못한다구! )
(흐어어어어헉!!!!!)
… 주어진 ‘성감’ 대에서의 쾌락과 욕망을 금지하거나 그 위치를 설정하는 행위야말로 몸의 표면을 가득 채운 일종의 젠더 특징적 우울증이다. 쾌락적 대상의 상실은 바로 그 쾌락과의 합체를 통해 해결되며, 그 결과 쾌락은 젠더 특정적인 법의 강제효과를 통해 결정되고 금지된다.
이부분.. 잘….자자자아아아아알….!(띠용!)
” 물론 근친상간 금기는 동성애 금기보다 더 포괄적이긴 하지만 이성애적 동일시가 설정되는 이성애적 근친상간 금기의 경우, 상실은 슬픔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동성애적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경우, 상실은 우울증적 구조를 통해 유지된다. 이성애적 대상의 상실은 그 대상의 대체로 귀결되는 것이지, 이성애적 목적의 대체로 귀결되지 않는다. 반면 동성애적 대상의 상실은 목적과 대상의 상실 둘다를 요구한다. 대상만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도 완전히 부인된다. ‘난 그 사람을 상실한 적도, 사랑한 적도 없으며 사실 그런 종류의 사랑조차 전혀 느껴본적이 없다.’가 되는 것이다. 이 사랑의 우울증적 보존은 ‘부정’이라는 총체화된 항로를 통해 안전하게 보호된다.”
.. 동성애적 카섹시스, 욕망과 목적을 다 거부하는 것, 사회적 금기에 의해 강제되고 발달 단계들을 통해 전유된 거부의 결과는 우울증의 구조로 귀결된다. 그 우울증의 구조는 사실상 지속적인 부정을 통해 만들어진 육체공간이나 ‘지하밀실’에 그 대상과 목적을 가두어 버린다. “”
만일 이성애자들이 동성애를 거부한 결과가 우울증이고, 우울증이 합체를 통해 작동되는 것이라면 거부된 결과가 우울증이고, 우울증이 합체를 통해 작동되는 것이라면 거부된 동성애적 사랑은 반대편에서 규정된 젠더 정체성을 발전시킴으로써 보존된다. 다시 말해 거부된 남성 동성애는 강화되거나 통합된 남성성에서 극에 달한다. 이때의 남성성은 여성성을 생각할수도,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것으로서 유지한다. 그러나 이성애적 욕망의 인식은 원래 대상에서 이차 대상으로 나아가며, 프로이트가 전형적인 슬픔의 특징이라고 주장한, 바로 그 리비도의 분리와 재결합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성애 욕망을 생각조차 할수 없는 동성애자는 , 분명 그 이성애를 합체의 우울증적 구조, 즉 인식되지도 애도되지도 않는 사랑의 체현과 동일시를 통해 유지된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이성애자가 근본적으로 동성애적 애착의 인식으로 거부하는 것은 우울증적 동성애의 경우와 달리 동성애 금지에 의해 문화적으로 강제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성애적 우울증은 문화적으로 제도화된것이고 반대편 욕망과 관계 맺고 있는 안정된 젠더 정체성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만 유지되는 것이다.
아.오. 너무나도 재밌읍니다. 이책.. 아. 아쉽다. 책을 갖다줘야 되는것이…. 으악!!ㅜㅜ.. (그래서 더 재밌는거야.. 실은..그래스리스리스리랑카.결정주의와 자유주의와의 싸움 우당탕탕! 삐요요오오옹~~~… 지그르르르르… 보글보글 지글지글…쭈글쭈글… 할머니! 할아버지! 오! 자네!! 중세시대로! 미래로!롤케익!끝말잇기는 재밌어.)


2015-09-05

page 351.

결론 - 패러디에서 정치성으로

||(? )(행위주체성을 어떻게 발휘할것인가? 그 말이 기억에서 까먹어 버렸다.)

“의미화 실천”

“행위 주체성의 문제는 의미화와 재의미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의 문제로 재공식화된다.”

“자신의 행위를 감추면서 결과만을 자연스럽게 보이려 하는 의미화 관행

“의미화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그 안에 인식론적 담론이 ‘행위주체성’이라고 지칭한 것을 품고 있다.”

||? 도대체 이말이 무슨 말인지 잘모르겠어.?
“주체는 자신이 태어난 규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의미화란 토대를 다지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규제된 반복과정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모든 의미화 반복하고자 하는 충동의 궤도에서 발생한다.”
||? 왜 사람은 반복하고자 하는 충동 을 가지는 것일까?
” 그러나 ‘행위주체성’도 그런 반복중에 변형될 가능성 속에 위치하는 것이다.”
정말. 정말. 정말. 무슨 말인지.. 전혀.. 전혀.. 감이 오지 않아…
만일 의미화를 지배하는 규직들이 규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인식 가능서으이 대안적 영역을 주장할수 있게 만든다면, 다시 말해 위계적 이분법의 단단한 코드에 저항하는 새로운 젠더의 가능성을 주장할수 있게 만든다면, 정체성의 전복은 오로지 반복된 의미화 실천의 내부에서만 가능할것이다. 주어진 젠더가 되어야 한다는 명령은 필연적인 실패, 즉 다양한 비일관적 배치물을 만들어 낸다. 그 다양성 속에 자신을 생성해낸 명령을 능가하고 그에 저항하는 배치물 말이다.

게다가 주어진 젠더가 되라는 명령 자체도 담론의 경로를 통해 발생한다. 즉 좋은 엄마되기, 이성애적으로 바람직한 대상 되기, 적합한 근로자 되기, 종합하자면 다양한 요구에 한꺼번에 응답하면서 가지각색으로 보증할 만한 사람으로 의미화되기 등의 명령 말이다. 이런 담론적 명령의 공존이나 융합은 복합적인 재배치와 재전개의 가능성을 만든다.

이제 이부분이다… 내가 생각하는..
그것은 이런 융합의 한가운데서 행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초월적 주체가 아니다. 여기에는 이런 융합에 앞서 존재하는 자아도, 갈등하는 문화적 장으로 등장하기에 앞서 ‘통합성’을 주장하는 자아도 없다. 그저 그들이 내놓은 도구를 선택하는 것만이 있으며, 이런 ‘선택’은 거기에 놓여 있는 도구 때문에 가능하다.
무엇이 젠더의 의미화 실천 속에서 전복적인 반복을 구성하는가? 예컨대 섹스/젠더의 구분에서 섹스는 ‘실제적인 것’ ‘사실적인 것’으로, 또한 젠더는 문화적 각인 행위로 작동하는 물질적이거나 육체적인 토대로 상정되어 왔다고 나는 주장해왔다. … 문제는 그 각인이 자기 안에서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문화적 장치가 도구와 몸의 만남을 주선하는가, 또 이런 의례적인 반복에는 어떤 간섭들이 가능한가이다. ‘실제적’ 이고 ‘성적으로 사실인’ 것은 구성물, 즉 본질의 허상들이다. 몸은 이런 구성물에 근접하기를 강요받지만 결코 근접할 수 없다.

그렇다면 환영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간의 균열은 무엇으로 드러나며,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실재가 자신을 환영으로 인정하다니?? 어떻게 하우하우하우??
실재가 자신을 환영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당연시된 정체성을 재통합하라는 명령의 규제에 종속되지 않는 반복의 가능성을 제시하는가?
몸의 표면이 자연적인 것 처럼 작동되듯, 이런 표면들도 자연스러운 것 자체의 수행적 위상을 드러내는 불협화음과 탈자연화가 수행되는 장소가 될수 있을까?
… 이처럼 ‘실재적’ 이거나 ‘자연스러운 것’을 체현하는데 실패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젠더 수행상의 구성적 실패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젠더 규범의 상실은 본질적인 정체성을 불안하게 만들고, 중추적인 ‘남자’와 ‘여자’ 주인공들에게서 강제적 이성애라는 당연시된 서사를 제거함으로써, 확산된 젠더 배치의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젠더의 패러디적 반복은 단단한 심층과 내적 본질이라는 젠더 정체성의 환영 또한 폭로한다. 미묘하고도 정치적인 방식으로 강제되는 수행성의 결과로서, 젠더는 하나의 ‘행위’이다.
말하자면 균열, 자기-패러디, 자기 비판에 열려 있는 행위이다. 젠더는 자신을 과시하면서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것’의 과장된 전시를 통해 그 근본적인 환영적 지위를 드러낸다.
… 문화적으로 인식 가능한 ‘성’을 생산하는 암묵적 규제들은 자연화된 토대보다는 생산적인 정치구조로 이해되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정체성을 하나의 효과, 즉 생산된 것이나 산출된 것으로 새롭게 개념화하면 젠더 범주를 근본적이거나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는 입장들이 ) 음흉하게 배제했던 ‘행위주체성’( agency, or freedom)의 가능성을 열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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